생활Story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기독교인이 되다.

노아김 2025. 4. 2. 20:35

우리는 왜 기독교인이 되는가? -1편-

중학교 동창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20대 시절에 잠시 만난 적이 있지만, 그 후 3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연락이 왔던 터라,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 더 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부산의 뒷골목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생활이었다.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은, 뇌출혈로 인한 생사의 귀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목사라는 것도 그가 알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도 함께 알렸다.

삶의 형태로는 기독교와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친구이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기독교인이 되는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연신 나에게 세상의 삶이 무상하다는 것을 쏟아 놓는다.

나는 그의 말에 동조하며 빠른 쾌유와 신앙을 통한 위로를 하였다.

 

기독교인이 되는 동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개인적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도 그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최후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죽음을 눈앞에 둔 십자가상의 강도는 자신의 처지와 함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심오한 신학적이며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죄 때문에 형벌을 당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 그 분의 진실함을 믿겠다는 고백이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간결하고 강력한 신앙의 정의이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할 때에, 예수님 앞에서 다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질문을 한다면 답을 내릴 수 있다.

 

나는 죄인이지만, 당신은 무죄한 자입니다. 그 무죄한 자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내용을 자세하게 이해할 시간이 없지만, 난 이 상황을 믿으니 당신의 그 의미가 나와도 상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주소서!”

 

하는 절박한 신앙고백이다.

 

신앙을 이렇게 절박한 가운데 찾아온다.

절박한 상황 속에 자신의 비천함을 예수라는 구원의 본질 앞에서 발견할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