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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교회의 본질/5,6장 예수그리스도와 교회

노아김 2025. 11. 3. 10:04

5장.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동성

1. 텅 빈 장소에서 시작된 가장 충만한 공동체

 솔직히,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서기 30년경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과연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인식이나 할 수 있을까? 거대한 첨탑도,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도, 심지어 정해진 예배당 건물조차 없었던 그들의 모임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와는 너무나도 달랐을 테니까요.

 

 어느 날 오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보다가 문득 그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때 제 손에는 누렇게 변한 종이로 된 사도행전 필사본이 놓여 있었는데, 행여나 잉크가 번질까 조심하며 펴든 페이지에는 초대교회에 대한 짧지만 강렬한 묘사가 담겨 있었죠. 바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이 문장을 보고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정말 그랬지. 초대교회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구나. 그들에게 교회는 거룩한 건물이 아닌, 매일의 일상 속에서 충돌하고, 나누고, 서로를 세워주던 역동적인 삶의 현장이었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너무나 자주 ‘무엇을 보존하고 유지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건물의 노후화, 재정의 안정성, 프로그램의 지속 가능성 같은 것들이죠. 물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이었어요. 가진 것이라곤 그 믿음 하나뿐이었는데, 그 믿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들의 모든 삶의 양식을 바꿔버렸죠. 이들에게 '교회'란 건물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안에 거한다는 사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부름 받은 자들(에클레시아)'이라는 정체성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텅 빈 장소였기에 오히려 가장 충만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역설적이지만 진실된 깨달음이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역동성의 유일한 에너지원

 초대교회의 역동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사도들의 열정이나 성령의 능력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저는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에 대한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공동체의 모든 역동성은 그분의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에서 터져 나온 강력한 에너지였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메시지는, 당시 유대 사회의 고정관념과 로마 제국의 통치 질서를 완전히 뒤흔드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죠.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랐던 스승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제자들이 느꼈을 좌절감과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살아나셨다니! 이 믿음은 절망을 희망으로, 공포를 담대함으로 바꾸는 근본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온 몸을 지탱하시듯,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비유를 넘어선 실제적인 삶의 원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이, 공동체 내의 가난한 이웃이나 고통받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자발적인 나눔'의 근원이었습니다.

 이 역동성은 또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등하다는 이 혁명적인 선언은 당시의 계급 사회와 인종적 편견을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노력이나 사회 개혁 운동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라는 동일한 신분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저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에클레시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잣대로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에너지원 하나로 묶여,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사랑과 공의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역동적인 공동체 말입니다.

3. 떡을 떼고, 기도하고, 모든 것을 통용하다: 코이노니아의 폭발

 초대교회의 역동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장면은 아마도 그들의 코이노니아(Koinonia), 즉 '교제와 나눔'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일상적이고도 혁명적이었는지 증언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초대교회의 'DNA'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기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떡을 떼는 행위'입니다. 이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과 함께 떡과 잔을 나누셨던 성만찬의 기억을 일상 속에서 재현하는 행위였죠. '집에서 떡을 떼며'라는 표현은 그들의 신앙생활이 특별한 의식으로 분리되지 않고, 삶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식사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당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만 거룩함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식탁 자체가 예배의 장소, 성찬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들의 코이노니아는 공적인 예배와 사적인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교제는 재산의 공유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는 사도행전의 기록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적인 강제였는지, 아니면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하지만 문맥상 분명한 것은, 그들이 소유의 개념을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고,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코이노니아의 폭발적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영적인 연합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영혼을 깊이 연결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사랑은 물질적 소유를 초월하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취미나 관심사가 같아서 이루어지는 친목 모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서로의 영적인 깊이를 나누고, 서로의 필요를 기꺼이 책임지려는 '희생적 사랑'이 전제된 공동체에서만 피어나는 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 꽃을 만개시켰던 것입니다.

4. 연구자료 속의 초대교회: 건물을 넘어선 '운동'

 제가 신학 공부를 하면서 가장 흥미롭게 탐구했던 분야 중 하나는 초기 기독교 기록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이후의 교부(敎父)들의 기록이나, 로마 역사가들의 문헌을 살펴보면, 초대교회가 당시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 입장에서 기독교는 '건물을 갖지 않은 위험한 운동'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각자의 신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안에서 제의를 행했기에 통제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건물 없이, 심지어 비밀리에 개인의 집에서 모였고, 그들의 왕이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으니,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겠죠.

 터툴리아누스 같은 초기 교부는 기독교인들을 향한 오해와 편견에 맞서 『변증』을 썼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 자신들은 신전을 숭배하지 않을 뿐, 참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반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신앙이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삶' 그 자체로 발현되었다는 점입니다.

 

 로마인들이 이해하는 종교란 웅장한 신전과 복잡한 제사를 의미했지만, 기독교인들의 종교는 병든 자를 돌보고, 노예와 자유인이 함께 식탁을 나누며, 심지어는 순교까지 감수하는 '윤리적 실천'이었습니다. 이는 교회가 건물이 아닌 '운동(Movement)'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운동성'은 지리적 확산 속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로마 제국 전역으로, 심지어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인도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건물을 짓고 교단 본부를 세우는 방식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속도였습니다. 이들이 가진 유일한 '인프라'는 사람들의 입과 발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집이 곧 교회가 되었고, 그 삶의 현장이 하나님 나라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 연구의 대가인 학자들은 초대교회가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했던 개인주의와 계급주의 속에서 '대안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분석합니다. 로마 사회가 무너뜨렸던 상호 부조와 인간적인 연대감을, 교회 공동체가 집집마다 모여 떡을 떼고 재산을 나누는 코이노니아를 통해 다시 세웠다는 것이죠. 이 공동체는 로마 시민들에게 희망과 안정을 제공하는 '보이지 않는 사회 안전망'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바로 이 '건물을 넘어선 운동'으로서의 역동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5. 우리 안의 그리스도, 역동적인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

 초대교회가 보여준 역동성은 비단 1세기의 특정 시기에만 가능했던 특별한 현상은 아닙니다. 저는 그 역동성이 여전히 오늘날의 우리 안에서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역동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근본적인 원리에 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셨지만, 성령을 통해 그들 안에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의 그리스도'이며, 이 임재가 공동체의 모든 활동을 움직이는 영구적인 동력이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모여 떡을 떼고 교제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떡 떼는 행위'는 오늘날 우리의 식탁, 우리의 대화, 우리의 봉사 현장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의 거룩성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를 초대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예를 들어, 퇴근 후 가족과 나누는 저녁 식사 자리, 직장 동료와 함께하는 커피 한 잔의 대화, 봉사 단체에서 땀 흘리는 시간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는 코이노니아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자주 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건물을 드나들며 '교회에 왔다 갔다'는 행위로 신앙생활의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교회는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에클레시아'는 건물 안에 갇혀 있지 않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세상 속으로 흩어져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 숨 쉬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역동성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거대해진 교회가 종종 본질을 잃고 내부적인 갈등이나 세속화의 문제에 직면하는 이유는, 그 역동성의 에너지원이 '그리스도의 임재와 코이노니아'에서 '재정과 프로그램'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오히려 순수했고, 건물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자유로웠으며, 끊임없이 흩어졌기에 역동적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 이 가장 강력하고 변치 않는 에너지원을 중심으로 다시 우리의 일상 공동체를 세워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교회'의 살아있는 정의를 회복하고 그 역동성을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일 테니까요.

 

6장. 우리 안의 그리스도, 교회의 살아있는 정의

1. 당신은 성령이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이 구절은 건물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던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해방감을 안겨줍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순례했던 것과 달리,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전은 이동 불가능한 건물이 아니라, 성령이 거주하시는 살아있는 인격이 된 것입니다.

 이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심오합니다. 내가 곧 성전이라는 것은, 거룩함이 '장소'가 아닌 '내 존재'에 귀속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특별한 장소나 시간을 찾아 거룩함을 얻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숨 쉬고, 일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순간이 거룩함의 현장이 됩니다.

저는 이 진리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신앙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주일에 교회 건물에 가지 못하면 왠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마치 휴대전화가 와이파이 영역을 벗어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내가 성전이며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확신한 순간, 와이파이는 이미 내 안에 내장된 무제한 데이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성전 의식의 회복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꿉니다. 우리의 육체는 더 이상 죄를 짓거나 방탕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모두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지성소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가장 원형적이고 기본적인 정의입니다.

2. '내 안의 그리스도'와 '머리되신 그리스도'

 교회의 정의를 완성하려면, 내가 '성전'일 뿐만 아니라, 그 성전들을 하나로 묶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비유는 매우 강력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 곧 그리스도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1. 그리스도가 머리시다: 교회의 지도자나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입니다. 이 사실은 교회가 인간적인 권력이나 재력에 의해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2. 우리는 몸의 지체이다: 우리 각자는 성전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아무리 작은 손가락이나 발가락이라도 몸 전체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몸의 비유'는 건물을 벗어난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설계도입니다. 몸의 각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만약 손가락이 머리의 지시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발이 걷기를 거부한다면, 그 몸은 병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건물 교회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통치(머리의 지시)를 거부하는 신자들의 모임 역시 참된 교회라 부를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교회 공동체는 모든 지체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서로의 역할과 은사를 존중하며, 사랑으로 스스로를 세워나가는 유기적인 연합체입니다. 나의 은사가 다른 지체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다른 지체의 강점이 나의 연약함을 돕는, 이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바로 교회의 살아있는 정의입니다.

3. '말씀'과 '성령'이라는 두 기둥

 교회가 건물이라는 구조물을 벗어던질 때, 우리는 새로운 두 기둥, 즉 '말씀(The Word)'과 '성령(The Spirit)' 위에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건물을 중요시하면서, 말씀은 성직자의 전유물이 되었고, 성령은 신비주의나 감정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본질을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곳'으로 재정립했습니다. 이 '말씀의 바른 선포'는 오늘날 우리 개개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내가 곧 성전이라면, 나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성전 내부를 깨끗이 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 말씀을 깨닫게 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공동체 활동과 선행은 그저 인간적인 노력이나 윤리적 행위에 머무를 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합의 끈'이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능력을 주시는 '능력의 근원'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성경을 펼치며 깨닫습니다. 말씀은 내가 지어야 할 교회의 설계도이며, 성령은 이 설계도대로 교회를 지을 수 있는 건설 기술자와 같습니다. 이 두 가지가 내 안에서 온전하게 작동할 때, 나는 비로소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의 살아있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건물 없는 교회'의 필수적인 영적 자원입니다.

4. 일상 속의 '작은 성례전'의 회복

 건물 중심의 교회는 세례, 성찬식 같은 공적인 성례전(Sacrament)을 중요시했습니다. 물론 이 예식들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 예식이 일상적인 삶과 분리되어 '특별한 건물 안에서만 유효한 의식'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 회복은 일상 속에서 '작은 성례전'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사 자리에서 가족이나 동료와 함께 떡을 떼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성찬식'의 연장선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고통받는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작은 섬김의 행위는 '세례'의 의미를 실천하는 또 다른 방식일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직업적 소명이나 봉사 활동 자체를 '세속 성례전(Secular Sacraments)'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는 건물의 벽을 넘어, 우리의 모든 행위가 거룩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통찰을 줍니다.

 결국 교회의 살아있는 정의는, 주일 건물 안에서 행하는 거룩한 의식과 평일 일상 속에서 행하는 평범한 행위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 완성됩니다. 모든 행위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향할 때, 나의 삶은 거룩한 성전이자 세상 속의 성례전이 됩니다.

5. 내가 변해야 세상이 교회로 변한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도, 제도도 아닌,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된 '나' 자신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바로 서고, 머리되신 그분의 지시에 따라 삶을 살아가며,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교회의 살아있는 정의가 됩니다.

 

 이러한 개인의 변화 없이는 어떤 공동체도, 어떤 건물의 재정의도 공허할 뿐입니다. 내가 먼저 빛이 되어야, 그 빛을 품은 작은 교회(가정, 일터)가 세상을 향한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존재의 가장 최소 단위이자, 가장 강력한 본질입니다.

 우리가 건물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것을 멈추고 내면의 성전 건축에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거대한 건물 때문이 아니라, 그 건물 안에 있는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