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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e-Book/우리는 정말 교회를 '교회'라 부르는가?(1부)

노아김 2025. 11. 2. 14:56

작가의 말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조금 당황스러운 질문 하나 때문이었어요.

 "아빠, 교회가 뭔가요?"

 어느 날, 사춘기를 겪는 제 딸아이가 뜬금없이 물었죠.

 저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어요.

 "그럼 주차장 넓고 십자가 불이 반짝이는, 그 큰 건물 말고 진짜 교회요."

 음, 정말 뒷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달까요. 그 순간, 저는 제가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건물'과 '조직'의 이미지를 덧씌워왔는지 깨달았죠.

 

 우리가 정말 입으로는 교회를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장소'로 여기고 있진 않았을까요?

 주일 아침, 습관처럼 차를 몰아 '교회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그 안도감, 그것이 과연 신앙의 본질과 얼마나 가까울까요?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제 자신이 솔직하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당황스러웠던 딸아이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저 자신의 정직한 고백이자, 함께 답을 찾아가는 질문의 기록입니다.

 저와 같이 혼란을 느끼거나, 교회의 본래 의미가 궁금했던 모든 분들과 함께 이 오래된 질문을 파헤쳐 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질문에 답하는 여정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하고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진정한 시작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딸아이의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기 위해 저는 다시 성경과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사람처럼, '교회'의 어원인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본래 의미를 파고들었죠.

 흥미롭게도 그 단어는 '건물'이나 '장소'와는 애초에 아무 상관이 없더라고요. 글쎄, '밖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 그 자체였던 겁니다. 이 발견은 제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동시에 가슴 뛰는 희망이기도 했어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그 본질적인 의미가 어떻게 거대한 건축물과 화려한 의식 아래 파묻혀 버렸는지, 그 역사적인 변천 과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중세의 권력 구조, 종교개혁자들의 외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교회의 모습까지... 마치 오랜 먼지가 겹겹이 쌓인 보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듯한 기분이었죠.

 

 이 과정을 통해 저는 교회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고백 위에 선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실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2부에서 다루게 될 내용들이 바로 이 지적이고 영적인 여정의 기록이에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은, 그 어떤 웅장한 건물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그 삶이 엮어내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깨달음, 정말이지 우리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만한 아름다운 진실이 아닐 수 없죠. 우리가 교회라고 불렀던 장소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입니다.

 

1부 질문을 던지다, 교회의 그림자

1장. 우리가 서 있는 이 건물, 정말 교회인가?

 

 나는 평생 교회 근처에서 살았다. 정말이지, 나에게 교회는 언제나 그 '건물'이었고, 그 '장소'였다. 어렸을 적 추억 속의 교회는 마을 어귀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건축물이었고, 밤에는 십자가 첨탑의 붉은 불빛이 동네 전체를 비추는 일종의 랜드마크였다. 주일 아침이면 엄마 손을 잡고 그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느꼈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안정감과 소속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건물 자체가 주는 권위랄까, 혹은 굳건함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웅장한 아치형 천장과 잘 닦인 대리석 복도를 걸을 때면, '아, 나는 지금 거룩한 곳에 와 있구나' 하고 자동적으로 생각하곤 했으니까.

 솔직히, 그 건물이 가진 물리적인 존재감은 때로는 신앙의 부족함까지 채워주는 듯한 기묘한 힘이 있었다. 삶이 힘들거나 신앙에 회의가 들 때도, 그 거대한 벽과 창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로를 얻었다. 교회 건물이 뿜어내는 육중하고 흔들림 없는 에너지는, 세상의 불확실함 속에서 나를 보호해주는 거대한 방패처럼 느껴졌던 거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교회에 간다"고 말했고, "교회에 다닌다"고 표현했으며, 어떤 교회를 소개할 때도 늘 주소와 규모, 주차 시설을 이야기했다. 나 역시 별다른 의문 없이 그 언어의 프레임 안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다. 교회 건물은 단순한 장소를 넘어, 우리 신앙의 정의 그 자체였다. 그게 문제였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몇 해 전, 친한 후배가 다니던 교회를 갑자기 그만두면서 내게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형, 저희 교회 건물은 정말 멋있었어요. 건축상도 받았거든요. 근데 건물은 멋있는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삭막할까요?"

 

후배는 멋진 건물에 대한 자부심과, 그 안에서 경험한 인간적인 상처와 실망감 사이에서 극심한 괴리를 느꼈다고 했다. 그는 주일마다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섰지만, 그 안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만나지 못했고, 결국 그 건물을 떠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했다. 

 

 "건물은 교회인데, 왜 교회가 아닌 걸까요?"

 

 이 질문은 나를 다시 한 번 딸아이의 질문 앞에 세웠다. 우리 사회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강력하게 '물리적 실체'를 의미하게 되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습관 속에 이미 깊숙이 박혀버린 이 '건물 중심'의 사고방식은 과연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을까? 가령, 우리는 '교회를 건축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사람들의 공동체를 세운다'는 의미보다는, '건물을 짓는다'는 물리적인 행위에 온 힘을 쏟지 않던가. 엄청난 재정적 부담과 에너지, 시간과 헌신이 오로지 건물의 규모를 키우고 유지하는 데 집중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보아왔다.

 건물이 크면 클수록, 빚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그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에 더욱 큰 무게를 실었다. 교회 주차장이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교회가 부흥했다'고 속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녕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눈에 보이는 성공, 즉 '부동산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집착에 불과했던 것일까? 나는 후배의 씁쓸한 고백과 내 안의 깊은 질문 앞에서,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대상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건물에 부여하는 이 엄청난 의미와 에너지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문제의식을 붙잡고 고전 자료들을 뒤적거리던 중, 나는 헬라어 원어인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와 우리말 '교회' 사이에 놓인 충격적인 간극을 발견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내게는 마치 봉인되었던 비밀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에클레시아', 글쎄,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밖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Call Out Of)'이라는 뜻이 아닌가. 고대 그리스에서 이 단어는 종교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단순히 '시민들의 공적인 모임'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광장에 모여 정치적 결정을 내리던 그 '회중' 자체가 에클레시아였던 것이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성경의 원어는 단 한 번도 '장소'나 '건물'을 의미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언제나 '모인 사람들의 동적인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였고, 그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누고 실천할 때, 비로소 '에클레시아'가 그 생명력을 발휘했다.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게 된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 역사적, 어원적 진실 앞에서 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만약 초대교회 신자들이 오늘날 우리의 언어습관을 듣는다면 얼마나 당황했을까? "우리가 건축한 이 '에클레시아' 건물은 대리석 바닥에..."라고 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분명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에클레시아'는 핍박 속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던 그들 자신이었고, 그들의 집이었으며, 그들이 나누던 떡과 포도주였다. 건물이 가진 견고함이나 화려함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언어의 왜곡, 즉 '에클레시아'라는 역동적인 공동체의 개념이 어떻게 '교회 건물'이라는 정적인 구조물로 굳어지게 된 걸까? 역사 속에서 교회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고, 권력과 결탁하면서부터 이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모이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공간은 점점 더 거대하고 화려해졌다.

 

 거대한 바실리카 건축이 교회의 표준이 되면서, 건물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신성한 장소'라는 지위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ai로 그린 바실리카교회 실제 교회를 재현

 건물이 신성해질수록, 그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능동적인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거룩한 장소에 와서 의식을 구경하고 수혜를 받는 '관객'이나 '소비자'로 변모했다. 주체가 건물이라는 장소로 이동하면서, 사람들은 그 건물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혹시 우리는 지금도 모르는 사이에 중세적인 건물 중심의 사고방식에 갇혀,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건물이 주는 위안과 안정감은 참 매력적이다. 건물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흔들리는 신앙을 대신 잡아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벽돌과 시멘트로 이루어진 그 견고함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는 쉼터처럼 작용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안도감'은 우리를 세상으로 흩어져야 하는 본질적 사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달콤한 독이 되기도 했다. 건물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해서, 우리는 세상이라는 냉정한 현실 속으로 다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 것이다.

 

 한번은 주중 오후, 텅 빈 예배당을 혼자 걸어본 적이 있다. 수천 명이 앉을 수 있는 그 거대한 공간은, 주일의 열기와는 달리 삭막하고 싸늘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을 뚫을 듯 높이 솟은 십자가는 낮 동안의 태양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지만, 그 공간에는 어떤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그 장엄함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교회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이 크면 클수록, 그 안에 '사람'이 없을 때의 공허함은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그 텅 빈 예배당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생각했다.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니었구나. 그럼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놀랍게도 성경에서 찾아낸 '에클레시아'의 의미 속에서 울려 퍼졌다. 교회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장소가 아니라, 바로 이 장소를 떠나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게 될 사람들, 집에서 육아에 지친 이웃의 어깨를 토닥이는 나의 손, 그리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는 나의 태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건물로 정의한다면, 예배가 끝나는 순간 교회는 텅 빈 공간으로 돌아가 버린다. 하지만 교회를 '사람들의 공동체'로 정의한다면, 예배가 끝난 후 세상으로 흩어질 때 비로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시작되는 셈이다. 이 관점의 전환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더 이상 주일 하루를 '교회에 다녀옴'으로써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안도할 수 없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일상이 '에클레시아'의 실천 현장이 되기 때문이다.

 

2장.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역사: 명칭이 변하고 의미가 흔들리다

 

 초대교회 시절, 신자들은 특정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박해를 피해 가정집에 모였고, 그들의 모임 자체, 즉 '사람들의 역동적인 공동체'가 곧 에클레시아였다.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예배당보다 '삶의 자리'에 훨씬 가까웠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다고 한다(행 2:46). 여기서 성전은 그저 그들이 모일 수 있었던 공적인 장소 중 하나일 뿐, 그들의 '교회'는 아니었다. 교회의 본질은 그들의 '행위'와 '관계'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 중심의 '에클레시아'가 물리적인 '건물'을 중심으로 사고하게 된 첫 번째 전환점은 언제였을까? 바로 로마 제국의 공인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기독교는 핍박받던 지하 종교에서 합법적인 종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더 이상 몰래 모일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모임을 위한 공공의 장소가 필요해졌다. 여기서 로마의 '바실리카' 건축 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바실리카는 본래 고대 로마의 공공 건물, 즉 재판소나 시장 역할을 하던 거대한 직사각형 구조물이었다. 로마 황실이 이 바실리카를 기독교에 제공하면서, 이 건물들은 자연스럽게 대규모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생각해 보시라. 핍박 속에서 숨어 지내던 공동체가 갑자기 로마의 가장 웅장하고 권위 있는 공공 건물에서 모이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상상 이상의 심리적,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의 권위가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공동체'에서, '황제가 승인한 웅장한 건물'로 슬그머니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건물은 단순히 모임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국가가 인정하는 종교의 '권력'과 '영광'을 상징하는 시각적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그 장엄함 속에서 신성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에클레시아의 본래 의미인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동적인 모임'보다, '이 거룩한 장소에 와서 예배하는 행위'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교회의 힘과 비례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사람들은 그 큰 건물에 속함으로써 안정감과 자부심을 얻었다. 마치 건물이 우리의 신앙을 대신 증명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중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 '건물 중심주의'는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중세 교회의 건물은 단순한 예배당을 넘어, 당대 최고의 예술과 건축 기술이 집약된 '지상 위의 하나님 나라'를 상징했다. 높이 솟은 첨탑,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 그리고 장엄한 내부 공간은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교회의 본질을 공동체적 삶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물리적인 장소에서 경험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찾게 되었다.

 

 이 시기에 '에클레시아'라는 개념은 더욱 희미해지고, 라틴어 '도무스 데이(Domus Dei, 하나님의 집)' 또는 '키리아케(Kyriake, 주님께 속한 것)'와 같은 용어가 더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키리아케'에서 파생된 것이 영어의 'Church'와 독일어의 'Kirche'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영어권이나 게르만어권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 자체가 '주님께 속한 장소나 물건'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며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 '교회(敎會)' 역시 '가르칠 교(敎)'와 '모일 회(會)'로 이루어져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에클레시아'의 '밖으로 불러냄'이라는 선택적 주체성보다는, '가르침을 받는 수동적 객체성'과 '모이는 장소'의 개념이 더 두드러진다.

 어쩌면 우리 동양 사회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 '건물 중심'의 사고방식에 더욱 쉽게 동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뿌리가 본질을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슬픈 역사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건물 중심주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첫째, 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 분리를 가속화했다.

 건물이 거룩해질수록, 그 건물을 관리하고 의식을 집례하는 성직자 계급의 권위는 비대해졌다. 일반 신자들은 건물의 거룩함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야 했고, 교회의 주인인 능동적인 '에클레시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둘째, 교회의 재정이 건물 유지와 확장에 과도하게 집중되었다. 중세의 웅장한 대성당 건축은 수많은 인력과 재정을 빨아들였고, 이는 곧 가난한 이웃을 위한 사역이나 세상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본질적인 사역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이 역사적 과정을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음에 소름이 돋았다. 교회의 건물을 최고 수준의 음향 시설과 화려한 미디어 시스템으로 무장하고, 수많은 부채를 짊어진 채 건물을 지키는 일에 매달리는 모습이 어찌 중세의 그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건물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공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건물에 부여하는 신학적 의미와, 그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붓는 에너지의 총량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역사적인 실수, 즉 '에클레시아의 정적인 화석화'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바로 이 '건물 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만인 제사장설'을 주창하며, 거룩함이 특정 건물이나 성직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부여된 것임을 선포했다. 루터에게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Visible Church) 이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의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회중(Invisible Church)이었다. 이 관점의 전환은 엄청난 혁명이었다. 교회의 주체가 거대한 건물에서 '개개인의 신앙고백'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개혁 정신은 건물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우선시하게 만들었다. 교회의 재정과 에너지를 다시 본질적인 사역, 즉 교육(가르침)과 이웃 사랑(구제)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했다.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회중이 모이는 집합소'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이는 교회의 의미가 비로소 다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건물의 그림자 아래 서 있다. 왜일까? 글쎄, 인간은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건물은 규모와 상징성을 통해 교회의 힘을 과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특히 20세기 폭발적인 성장기를 거친 한국 교회의 경우, '성장'은 곧 '건축'과 동의어처럼 여겨졌다. 건물을 짓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헌신처럼 포장되기도 했다.

 

 나는 어느 작은 교회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목사님의 고백을 잊을 수 없다. "우리 교인들은 건물만 보면 주눅이 듭니다. 옆 동네 큰 교회 건물과 우리 교회의 작은 건물을 비교하죠. 건물 규모가 곧 우리 신앙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처럼 느낀대요." 이 고백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회 건물'이 여전히 사람들의 신앙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건물은 단순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심리적 압도감'과 '비교 의식'을 심어주는 문화적 상징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적 흐름의 끝에 서 있다. 우리는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며 안정감을 얻으려 했지만, 역사는 건물이 아닌 '사람'에게 교회의 본질이 있었다고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다. 명칭이 변하고 의미가 흔들리는 이 과정을 되짚어본 이유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땅에서 '교회'라는 단어를 어떻게 재정의해야 할지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3장. 건물과 사람은 어떻게 분리되었는가

 우리는 앞서 '에클레시아'라는 역동적인 공동체의 개념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건물'이라는 정적인 상징으로 변질되어 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변질은 단순히 언어나 건축 양식의 변화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의 심리적 욕구구조적인 편리함이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 건물이 주는 안정감과 통제 가능성은 사람들의 불완전함보다 훨씬 매력적이지 않던가요? 저는 이 분리의 과정을 곰곰이 뜯어보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본질을 병들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건물과 사람이 분리된 첫 번째 지점은 '거룩함의 위치 이동'에서 시작됩니다.

 

 초대교회에서 거룩함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즉 그들의 관계와 행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을 때, 그 '성전'이 바로 당신의 몸을 의미했듯(요 2:21), 신약의 교회에서 거룩함의 현현(現顯)은 믿는 이들, 곧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에게 있었죠. 베드로 사도도 우리를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정말 놀라운 선언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공인 이후, 거대한 바실리카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 거룩함이 '공간'으로 환원되기 시작했습니다. 건물의 높이, 화려한 제단,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이 모든 물리적 요소들이 '거룩함'을 시각적으로 압도하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룩함의 주체임을 잊고 그저 거룩한 공간을 '방문하는 손님'이 되었습니다. 건물 안에서는 거룩하지만, 문밖을 나서는 순간 다시 속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이중적인 삶이 시작된 거죠. 이처럼 거룩함이 건물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할 절박한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어요. '교회 건물'에 가서 정해진 시간만큼 앉아 있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두 번째 분리는 '수동적인 예배자'의 탄생입니다.

 건물이 웅장해지고 의식이 복잡해지면서, 예배는 '회중 전체의 동적인 참여'에서 '성직자의 전문적인 집례'로 바뀌었습니다. 중세의 예배는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일반 신자들은 설교나 성만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구경꾼처럼 앉아 사제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죠. 그 과정에서 신자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고 세상을 향한 사명을 감당하는 능동적인 '에클레시아'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 환경도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아요. 강단은 높고, 화려한 조명과 음향 시설은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물론 기술의 발전은 긍정적이지만, 이 모든 장치들이 결국 '건물 안에서의 경험'을 극대화하여 신자들을 더욱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를 마치 '콘서트'나 '강연'을 관람하는 것처럼 소비하곤 하죠. 좋은 설교, 멋진 찬양, 완벽한 진행—이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면서, 정작 예배 후 세상으로 흩어져야 할 '사명의 실천'은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솔직히, '건물'은 참 다루기 쉽습니다. 건물을 관리하고, 보수하고, 확장하는 일은 눈에 보이고, 계획 가능하며, 목표 설정이 명확해요. 하지만 '사람'은 얼마나 복잡한가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 그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 이웃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일... 이것은 통제 불가능하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좌절감을 안겨줍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 즉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건물'이라는 통제 가능한 대상을 '교회'의 중심으로 놓게 만든 것입니다. 건물을 관리하는 것이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편했던 거죠.

 

 세 번째 분리는 '경제 논리의 침투'에서 비롯됩니다. 거대한 건물을 짓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규모를 키우고 건물을 확장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재정적 부담을 낳았고, 이 부담은 신자들에게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교회의 재정이 점차 '건물의 물리적 유지 및 확장'에 우선적으로 투입되면서, '사람을 살리고 이웃을 돕는' 본질적인 사역, 즉 구제와 선교의 영역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점입니다.

 

 나는 수많은 교회가 건물을 짓기 위해 수십 년 치의 미래 재정을 끌어다 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 헌신 자체는 숭고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교회가 이웃 사회로부터 어떤 시선을 받게 되었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라기보다는, '돈이 많은 집단',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세우는 사업체'처럼 비치게 된 겁니다. 교회가 건물에 쏟아붓는 자본의 크기는 때로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깊은 소외감과 위화감을 안겨주기도 했어요.

 교회의 성공 기준이 건물의 규모나 재정의 크기로 바뀌면서, 신자 개개인의 '영적인 부흥'이나 '일상 속 윤리적 삶'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퇴색되었습니다. 마치 주식 시장의 그래프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 지표(예배 출석 인원, 건축 헌금 목표 달성률 등)가 교회의 건강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여기서 교회는 본질적인 사명을 잃고, '건물을 지키는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집니다.

 저는 이 분리의 결과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 미친 영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건물이 거룩함과 안정감을 대신해주자, 우리는 '교회가 없으면 신앙생활도 불가능하다'는 무의식적인 의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일에 건물에 가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영적인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정말 건물이라는 외부 환경에 그렇게까지 의존적이어야 할까요?

진정한 '에클레시아'는 모이는 장소의 유무에 상관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건물이 없었기에 더욱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었고, 삶의 현장인 집과 거리에서 교회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소유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방식'이었던 겁니다.

 

 건물과 사람이 분리되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미래에 완성될 천국을 기다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건물을 유지하고 지키는 데 소모된다면, 우리는 정작 세상으로 나아가 '나라를 세우는' 본질적인 사명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분리된 현실을 극복하고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첫 번째 깨달음은 단순합니다. 교회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이 단순한 진실을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행동 변화를 요구합니다.

 

첫째, 일상의 거룩함 회복입니다.

 

 거룩함은 주일에만 건물을 방문하는 행위가 아니라, 월요일 아침 직장에서의 정직함,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의 인내, 그리고 가족을 향한 헌신 속에서 증명됩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의 일상 자체가 예배의 연속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배의 능동적 주체화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강단에서 주어지는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관객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 내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고, 받은 말씀을 세상으로 가져가 실천하는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자원의 재배치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재정과 에너지를 건물의 유지 관리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영적 성숙'과 '세상 속에서의 섬김'에 집중하도록 우리의 시각을 전환해야 합니다.

이 세 번째 장은 우리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건물 교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성경적 본질'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건물과 사람이 분리된 이 아픈 역사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교회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건물이라는 익숙한 껍데기를 벗고,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에클레시아'의 본질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