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이 글은 어쩌면 아주 불편하고, 심지어 불경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지갑이 던진 질문이다.
나는 오늘도 얇아진 지갑을 열어, 봉투에 금액을 적고 서명하는 순간 아주 잠깐 망설였다. 십일조. 기독교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의무이자, 축복의 통로라고 배운 그 ‘하나님의 것’. 매월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그 돈 앞에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돈은 정말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고 있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이건 단순히 돈이 아까워서 드는 질문만은 아니다. 물론 40대 가장으로서, 집 대출금과 아이들 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재정적 압박은 현실이다. 한 달 월급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내고 나면, '아, 이번 달도 빠듯하겠구나' 하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교회 강단에서는 늘 십일조가 "복의 근원", "장자권", "하나님의 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선포된다.
하지만 나의 지갑은, 아니, 나의 영혼은 묻는다. 나는 그 축복을 위해 헌금을 드리는 건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감사 때문인가? 만약 축복이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려야만 하는가? 이 율법적인 의무감과 현실적인 압박감, 그리고 성경적 양심 사이에서 나는 오랫동안 갈등해 왔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지금 내가 드리고 있는 이 십일조가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그 십일조와 일치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율법적 명령을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구약의 십일조는 단순한 종교 헌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금의 역할, 즉 레위 지파의 행정과 성전 운영 비용이자, 가장 중요하게는 고아, 과부, 나그네 같은 이웃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 복지 기금의 성격이 강했다. 그들의 창고는 단순한 교회 금고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삶을 지탱하는 나눔과 복지의 창고였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는 어떤가? 십일조의 복지적 기능보다는,
거대한 교회를 짓고 유지하는 행정 비용, 혹은 목회자의 사례비에 더 많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불편한 질문은 이 지점에서 폭발한다.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쓰임은 인간의 조직을 위한 것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십일조에 대한 건전한 비판 의식을 통해, 나의 헌금 생활에 주체적인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우리의 헌신이 율법적 의무가 아닌, 본래 하나님이 원하셨던 이웃 사랑과 공공성 회복의 수단이 되기를 갈망한다.
자, 이제 내 지갑의 현실과 성경이 말하는 신의 나라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여정을 시작해 보자. 이 불편하지만 솔직한 질문을 통해, 우리는 십일조를 기계적인 의무에서 주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되돌릴 수 있는 대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장. 개인적 경험으로 시작: 내 지갑이 교회 재정을 물을 때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있다. 마치 계곡의 급류처럼, 잠깐 머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정해진 목적지로 흘러가 버린다. 40대 중반, 가장으로서 내가 매달 마주하는 이 냉정한 현실 앞에서, 내 신앙의 가장 첨예한 질문이 시작된다. 바로 '십일조'에 관한 물음이다.
나는 꼬박꼬박 십일조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해야만 한다고 배워왔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창고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 그리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놓친다는 두려움. 수십 년 동안 그 메시지는 내 신앙의 가장 강력한 의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아침마다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고, 두 아이의 학원비를 계산하며, 매달 나가는 주택 대출 이자에 한숨을 쉬는 '나'는 더 이상 추상적인 헌신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통장에 찍힌 액수가 현실의 무게로 와닿을 때, 그 10%의 액수는 결코 작지 않다. 성경책에 굵은 글씨로 새겨진 '축복의 약속'보다, 당장 다음 달 카드값을 막아야 하는 '현실의 압박'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십일조를 송금한 뒤 통장 잔고를 볼 때마다 불편한 질문이 지갑에서 솟아난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단순히 돈을 아까워하는 인색함이 아니다. 이 돈이 어떤 목적을 위해 쓰이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다.
내 지갑의 10%가 곧 나의 노동이고, 나의 시간이며, 나의 미래인데. 나는 그 대가로 '축복'이라는 막연한 약속 외에, 이 돈이 이웃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혹은 정말 주님의 나라를 위해 투명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다. 우리 교회의 재정 장부는 늘 비공개이며, '헌금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로 모든 질문이 차단되는 현실 속에서, 내 지갑은 계속해서 교회의 문을 두드린다.
"이 돈, 정말 신의 나라에 합당하게 쓰이고 있습니까? 당신의 창고는 지금 누구를 위해 열려 있습니까?" 내 지갑이 던지는 이 불편한 질문이야말로, 이 글이 시작되는 이유다. 이 질문은 십일조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다만, 십일조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고 싶은, 40대 직장인 교인의 간절한 외침이다.
2장. 문제의식 발견: 강제된 의무인가, 기쁨의 헌신인가
1장에서 내 지갑이 던진 현실적인 질문은 결국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십일조 설교는 보통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에 기반을 둔다. 이 구절은 종종 축복을 받기 위한 일종의 '거래'나 '보험'처럼 해석된다. 십일조를 드려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고, 드리지 않으면 재정적 어려움이나 심지어 '도적질'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는 압박감 말이다.
이러한 율법적인 프레임은 내 신앙을 끊임없이 옥죄었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마다, 십일조를 먼저 떼어놓지 못하면 마치 내가 엄청난 영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 의무감은 진정한 '기쁨의 헌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벌 받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경우가 더 많았다.
십일조는 본래 감사의 표현이어야 마땅하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 중 10분의 1을 돌려드림으로써, 나머지 90%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다. 그런데 왜 이 고백의 행위가 현대 교회에서는 가장 무거운 율법적 의무로 변질되었을까?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 헌금의 본질은 '자발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즐거움이 없는 억지로, 축복을 위한 인색한 거래로 십일조를 수행하고 있다. 내가 드리는 헌금이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교회의 재정 목표를 채우는 '강제 할당량'이 된 것은 아닌가?
이러한 괴리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에 대해 느끼는 내적 갈등의 핵심이다.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신앙과, 복음의 자유 안에서 자발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 진정성 사이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이제 우리는 말라기의 그 말씀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의 지갑에 어떤 자유를 주었는지 근본적으로 탐색해야 할 때다. 강제된 의무의 쇠사슬을 끊고, 진정한 기쁨의 헌신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이 성경적 뿌리를 찾는 여정에서 시작될 것이다.
3장. 첫 번째 깨달음: 십일조의 성경적 뿌리 탐색
십일조에 대한 논쟁은 늘 '율법이냐, 은혜냐'라는 이분법에 갇혀왔다. 하지만 그전에, 십일조라는 개념 자체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처음 등장했는지 그 기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말라기 3장 10절의 엄중한 경고 이전에, 성경은 십일조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십일조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율법이 주어지기 한참 전,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14장.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자기가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주었더라"고 성경은 간결하게 기록한다. 이 행위는 어떤 강제적인 규율이나 율법적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와, 대제사장이자 왕이었던 멜기세덱을 향한 존경과 인정의 표현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얻은 '첫 번째 깨달음'이다.
십일조는 본질적으로 '의무' 이전에 '감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는 구속력을 가진 조항이 아니라, 승리의 기쁨과 은혜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이었다. 마치 아이가 정성껏 고른 선물을 부모에게 건네는 것처럼, 가장 좋은 것의 일부를 기쁨으로 드린 것이다.
두 번째 깨달음은 야곱에게서 온다. 야곱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든 밤, 하나님을 만나고 서원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창세기 28:22) 야곱의 십일조 역시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생사를 오가는 방황의 길에서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그 은혜에 대한 미래의 서원이었다.
구약 율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십일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유지와 질서를 위한 제도화된 시스템으로 자리 잡는다. 모세 율법 하에서 십일조는 단순한 헌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위인(제사장 역할 수행)을 부양하고, 성막과 성전을 유지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가난한 이웃과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 위한 국가적 재정 시스템이었다.
이 제도화 과정에서 십일조는 세 가지 종류로 분화되었다는 신학적 해석도 있다.
성전을 위한 레위인의 십일조(첫째 십일조), 절기를 지키기 위한 비용(둘째 십일조), 그리고 3년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십일조(셋째 십일조)가 그것이다.
결국, 십일조의 성경적 뿌리를 탐색하면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축을 발견하게 된다.
- 은혜의 축: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와 서원. (기쁨의 헌신)
- 제도의 축: 율법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제사장과 사회적 약자를 부양하기 위한 공공재원. (복지와 행정)
지금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는 이 두 축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만약 후자, 즉 '제도의 축'에 가깝다면, 이 돈은 반드시 그 본래 목적에 맞게 '공공성'을 띠고 사용되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이 구약 십일조의 '제도'적 본래 기능, 즉 국가 재정과 복지 시스템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4장. 갈등과 혼란: 구약 시대 십일조의 본래 기능 (세금, 행정, 복지)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헌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를 운영하고 국민을 부양하기 위한 세금(Tax)이자 복지 시스템(Welfare System)에 가까웠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구약의 엄중한 십일조 명령을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1. 국가 운영 재원으로서의 십일조 (세금/행정)
고대 이스라엘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레위 지파는 오늘날의 공무원이나 성직자 역할을 겸했다.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처럼 땅을 상속받지 못했기 때문에(민수기 18:24), 그들의 생계는 오직 다른 11개 지파가 바치는 십일조로 유지되었다.
- 레위 지파 부양: 십일조의 1차 목적은 레위인의 생활비였다. 이들은 성전과 성막에서 봉사하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재판을 수행하는 등, 종교 및 행정 서비스를 제공했다. 레위인은 현대 사회의 성직자, 교육자, 행정가를 합친 것과 같았으며, 십일조는 이들의 '급여'였다.
- 공공 건물 유지: 십일조는 성전(성막)이라는 공동체의 중심 시설을 유지하고 제사 제도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품과 인력을 조달하는 데 쓰였다. 즉, 공공 기반 시설 유지비였다.
결국, 십일조는 이스라엘이라는 '신정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는 주된 수입원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내야 할 '국가 세금'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만약 현대 국가에 사는 우리가 국가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도로 건설, 국방, 교육 시스템이 멈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 시대에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국가 행정과 종교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반역 행위나 다름없었다.
2. 사회 안전망 구축으로서의 십일조 (복지)
십일조의 더욱 중요한 기능은 '복지'에 있었다. 구약 율법은 3년마다 드리는 '셋째 십일조(Third Tithe)'를 명시했다. 신명기 14장 28~29절은 이 십일조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 셋째 십일조는 고아, 과부, 나그네(객), 그리고 토지가 없는 레위인 등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한 구호 기금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실업 수당, 기초 생활 수급비, 사회 안전망 역할을 했다. 십일조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하나님 나라의 공의가 실현되는 구체적인 장치였다.
현대 교회의 십일조, 그 혼란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회의 십일조 운영과 심각한 갈등에 직면한다. 구약의 십일조는 '세금'과 '복지 시스템'이 명확히 결합된 공공 재원이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인은 이미 국가에 소득세를 내고 사회 복지 시스템(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을 통해 복지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십일조를 거두면서, 그 용도는 대부분 레위인 급여에 해당하는 '목회자 사례비'와 '교회 유지비(건물, 행정)'에 집중되고 있다. 구약 십일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복지(셋째 십일조)'의 기능은 현대 교회의 재정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십일조가 복지와 행정 기능을 상실하고 오직 '축복 거래'의 수단으로만 남는다면, 이는 구약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는 곧 '국가의 공공성'이었지만, 현대 교회의 십일조는 '축복을 위한 개인의 의무'가 되어버렸다. 이 갈등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잃어버린 '복지 기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5장. 타인과의 만남: 이웃과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의 의미
4장에서 우리는 구약의 십일조가 레위인이라는 공직자를 부양하는 '행정적' 기능을 담당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십일조의 영혼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웃과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재정적 응답이었다. 십일조는 나 자신의 축복을 위한 수단 이전에, 공동체의 가장 약한 고리를 지탱하는 사회적 계약이었다.
1. 잊혀진 세 가지 십일조의 순환
신학자들은 구약 율법에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고 해석한다.
- 첫째 십일조 (레위인 십일조): 매년 수입의 10%를 성전 봉사자(레위인)의 생계와 성전 유지에 사용. (행정/성직자 부양)
- 둘째 십일조 (절기 십일조): 매년 수입의 10%를 예루살렘이나 지정된 장소로 가져가 절기를 지키며 온 가족이 기쁨을 나누는 데 사용. 남은 것을 팔아 식량을 사는 등, 소비와 기쁨을 위한 용도.
- 셋째 십일조 (복지 십일조): 3년에 한 번씩 드리는 10%로, 레위인, 객(나그네),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성읍에 저축. (복지/구제)
셋째 십일조의 존재는 십일조의 목적이 개인의 재정적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 셋째 십일조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창고를 열어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었고, 그 행위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켰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신명기 26:12-13).
2. 가난한 자의 권리로서의 십일조
구약 율법이 놀라운 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다뤘다는 것이다. 들에서 곡식을 벨 때나 포도나무 열매를 딸 때, "밭 모퉁이를 다 베지 말며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명령했다(레위기 19:9-10). 이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 일부러 남겨두어야 할 의무였다. 십일조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한 이웃은 3년마다 쌓이는 '셋째 십일조 창고'에 접근하여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고, 누구도 굶주리지 않도록 설계된 신성한 안전장치였다. 이는 헌금자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땅의 소유자이심을 인정하고 공동체의 공공성을 유지하는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3. 현대 교회의 거울
오늘날 우리의 헌금 생활은 이 '타인과의 만남'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가? 십일조의 대부분이 대형 교회 건물을 유지하거나, 내부 인력의 급여와 행정 비용에 집중되면서, 셋째 십일조가 상징하는 '구제와 복지' 기능은 일반적인 '선교 헌금'이나 '구제 헌금'이라는 별도의 항목으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십일조의 본래 목적을 왜곡시킨다. 십일조의 10%는 '교회 건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십일조의 본래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의 헌금 일부를 의식적으로 외부 사회의 가장 연약한 이웃에게 돌려보내는 공적 책임감을 되찾는 것이다. 우리의 지갑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의가 세상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이며 다음 장에서 다룰 신약의 가르침과도 연결되는 고리다.
6장. 새로운 시각: 신약의 예수님은 십일조를 어떻게 보셨나
구약의 십일조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세금이자 복지 시스템이었다면, 신약의 시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모든 율법적 의무와 재정적 계약을 '은혜'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를 어떻게 평가하셨을까?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신약에서는 완전히 사라져야 할 개념이었을까?
1. 율법의 정신을 놓친 바리새인
예수님은 십일조를 직접적으로 폐지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꾸짖으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며, 십일조에 대한 논쟁의 핵심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박하(향신료)와 같은 아주 사소한 소산의 십일조까지 철저하게 계산해서 드린 그들의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그들이 십일조라는 행위의 '정신'과 '본질'을 버렸다는 것이다.
십일조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4장과 5장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義)', 즉 공의로운 분배와 '인(仁)', 즉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통해 자신들의 외적인 경건함을 과시했지만, 정작 그 십일조가 쓰여야 할 가난한 자와 약자, 즉 '인(仁)'을 위한 복지의 실현에는 인색했다. 예수님은 '이것도(십일조) 행하고 저것도(의와 인과 신)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십일조의 정신과 형식을 모두 놓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2. 가치의 역전: 두 렙돈 과부의 헌금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헌금의 기준은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두 렙돈 과부'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자들은 예물함에 많은 돈을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달랑 두 렙돈(가장 작은 동전)을 넣었다. 예수님은 과부가 가장 많이 넣었다고 평가하셨다. 그 이유는 양(量)이 아니라 질(質), 즉 마음의 중심에 있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일부를 떼어냈지만, 과부는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구약의 십일조 개념에 결정적인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온다. 헌금의 기준은 더 이상 율법이 정한 '10분의 1'이라는 비율적 의무가 아니라, '전부를 드린 마음'의 자세로 바뀐 것이다.
- 구약의 초점: 공의로운 분배와 공동체 유지를 위한 '양(量)의 기준' (10%)
- 신약의 초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는 '질(質)의 기준' (마음)
3. 신약 공동체의 새로운 재정 모델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재정 생활은 '십일조'라는 특정 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대신 '성령 충만하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산을 조금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사도행전 2:44-45, 4:32)'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십일조 폐지라기보다는, 십일조가 지향했던 구약적 정신, 즉 공의와 복지가 '율법적 강제'를 넘어선 '사랑의 자발성'으로 폭발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10%가 아니라 100%를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십일조의 외적인 형식보다 의와 인과 신이라는 본질적 목적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신약 시대의 우리는 율법적 의무감으로 10%를 채우려 할 것이 아니라, '두 렙돈 과부'처럼 전적인 마음으로 드리되, 그 헌금이 '바리새인'의 위선처럼 교회의 배만 불리는 데 사용되지 않고,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셨던 공의와 이웃 사랑을 실현하는 데 쓰이는지 주체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7장. 변화의 시작: 십일조의 '복지'와 '선교' 목적 회복 제안
우리는 개인의 재정적 질문으로 시작해, 구약 십일조의 본래 목적이 '세금/행정'과 '복지/구제'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일조의 외형보다 '의와 인과 신'이라는 본질을 강조하셨음을 깨달았다. 이제 이 모든 성찰을 바탕으로, 십일조의 본래 의미를 현대 교회에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이다.
십일조의 본래 목적 회복은 '폐지론'이 아니라 '재설정(Reset)'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십일조가 교회의 공공성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다시 정하는 것이다.
1. 잃어버린 '셋째 십일조' 정신의 복원
십일조 논란의 핵심은 '얼마를 드려야 하는가'가 아니라 '드린 것이 어디에 쓰이는가'에 있다. 구약의 셋째 십일조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명확한 '의무 지출 항목'이었다. 현대 교회는 이 정신을 재정 운용에 의무화해야 한다.
제안 1: 재정 운용의 투명성과 복지 할당 의무화
- 재정 공개 의무: 모든 헌금 내역과 지출 항목을 교인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재정의 흐름을 알 때, 교인은 비로소 헌금에 대한 주체적인 신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 복지 및 구제 의무 할당: 십일조 수입의 최소 30%(구약 셋째 십일조 비율과 유사하게)를 교회의 내부 운영(사례비, 건물 유지비)이 아닌, 외부 사회의 복지, 구제, 지역 사회 섬김, 선교 등에 의무적으로 할당하는 것을 공동체적으로 결의해야 한다.
- 예시: 수입된 십일조의 30%를 반드시 지역 노숙자 급식, 미자립 교회 후원, 외국인 노동자 쉼터 지원 등 '교회 밖'의 이웃을 위해 사용하도록 명문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확한 할당은 '성전 건축'과 같은 내부 지향적 소비를 줄이고, 십일조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2. 레위인 부양의 현대적 재해석 (목회자 사례비의 건전성)
구약에서 레위인 십일조는 그들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레위인은 기업(땅)이 없었기에 그 급여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대 일부 대형 교회의 목회자 사례비와 복리후생은 일반 교인의 평균 소득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안 2: 목회자 사례비 상한선과 생활비의 분리
- 사례비의 공공성 회복: 목회자의 사례비는 레위인의 목적과 같이 '안정적인 사역을 위한 합리적인 생활비' 수준으로 책정되어야 한다. 교회의 재정 규모에 따라 무한정 증액되는 구조를 지양하고, 교회의 공적인 재정 윤리 기준을 확립해야 한다.
- 투명한 기준 마련: 목회자 사례비는 교회의 일반 재정 지출 항목과 마찬가지로 투명하게 논의되고, 교회의 평균 재정 규모와 교인 수에 비례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목회자의 급여를 넘어선 초과 지출은 곧 십일조가 복지를 위해 쓰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3. '선교' 목적의 질적 성장
십일조 재정의 상당 부분이 '선교'라는 이름으로 쓰이지만, 때로는 이것이 교회의 규모를 과시하거나, 불필요하게 대규모 건물과 행사에 소모되는 경우가 있다.
제안 3: '보여주기식 선교'에서 '복지-선교'로 전환
- 지역 사회 연계 강화: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의 복지 문제 해결에 직접적으로 헌금을 사용함으로써, 선교를 '지역 사회를 섬기는 복지 활동'과 동일시해야 한다. (예: 지역 주민을 위한 무료 도서관, 저소득층 자녀 교육 지원)
- 공동체 재원의 사용: 교회의 모든 재정은 '나눔과 섬김'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이는 곧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강력한 선교가 될 것이다.
십일조가 '건물의 창고'가 아니라 '나눔의 창고'가 될 때, 우리의 불편한 질문은 비로소 성경적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제 개인의 주체적인 헌금 생활로 그 결단과 실천을 이어가야 한다.
8장. 실천과 적용: 주체적 헌금 생활과 건전한 교회 재정 참여
우리는 십일조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이 긴 여정 끝에 내 지갑이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십일조의 본질은 축복을 얻기 위한 '보험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자발적인 책임'"이라는 것이다. 율법의 족쇄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는 주체적인 신앙인으로서 헌금 생활을 '재설정'해야 한다.
1. 율법의 의무에서 사랑의 자발성으로
신약 시대에 십일조라는 특정 비율이 여전히 의무적인가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율이 아니라 마음이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면, 그것은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을 섬기려는 기쁨과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 재정적 결단: 십일조 논쟁에 지쳤다면, 아예 헌금의 이름을 '십일조'가 아닌 '하나님 나라 기금'이나 '복지 나눔 헌금'으로 바꿔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소득의 10%를 기준으로 삼되, 그 사용처를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 분리 실천: 예를 들어, 소득의 10% 중 5%는 교회의 내부 운영(목회자 부양, 시설 유지)을 돕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5%는 직접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거나, 투명하게 복지에 힘쓰는 소규모 교회나 사회 단체에 후원하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셋째 십일조 정신을 개인의 차원에서 회복하는 실천이다.
2. 건전한 교회 재정 운영에 참여하는 방법
개인의 헌금 생활이 주체성을 회복한다고 해도, 교회의 재정이 불투명하게 운영된다면 우리의 불편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교회의 재정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공적 자산이다. 따라서 건전한 교인은 재정 운영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 질문할 권리(The Right to Ask): 재정 운용의 투명성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기본 정보이다. 교회의 재정 사용처, 특히 대규모 지출(건축, 고가 차량 구매, 과도한 사례비 등)에 대해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정보 공개를 요청하고, 그 목적의 성경적 합당성을 질문해야 한다.
- 의견을 낼 의무(The Obligation to Speak): 예산 편성 과정이나 재직자 회의 등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십일조 재정의 복지 의무 할당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야 한다. "교회의 창고가 이웃을 향해 열려야 한다"는 성경적 가치를 공동체에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 대안 제시: 7장에서 제시했듯이, 십일조 수입의 일정 비율을 지역 사회 복지에 의무적으로 지출하는 '재정 윤리 헌장' 제정을 제안하고, 소규모 교회 목회자 B 목사님의 교회처럼 재정을 완전히 투명하게 공개하는 모범 사례를 제시하며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
3. '나의 창고'를 '나눔의 창고'로
이러한 실천은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십일조를 드릴 때마다 '내 돈이 떼이는 것 같다'는 죄책감이나 아쉬움 대신, '내 돈이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이루는 데 쓰이는구나'라는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체적 헌금 생활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행동 원칙으로 요약된다.
- 개인적 원칙: 의무감 대신 사랑에서 우러난 헌금을 드리고, 일부를 복지를 위해 직접 분리하여 사용한다.
- 공동체적 원칙: 교회의 재정 투명성을 요구하고, 십일조의 본래 목적인 복지와 구제에 쓰이도록 건전하게 참여한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지갑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멈추고, 신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모든 여정을 통과한 '현재의 나'의 모습을 정리하며 에세이를 마무리한다.
9장. 현재의 나: 신앙적 의미를 부여한 나의 재정 사용
내 지갑이 교회 재정을 물으며 시작했던 이 불편한 질문은 꽤 오랜 여정이었다. 율법의 의무에서 출발해, 구약의 공의와 복지 정신을 거쳐, 신약의 사랑과 자발성이라는 종착지에 이르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저주받을까 두려워' 십일조를 내는 수동적인 납세자가 아니다.
나는 '자발적인 책임'이라는 새로운 헌금의 옷을 입었다.
1. 지갑의 평화: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십일조를 둘러싼 가장 큰 고통은 '두려움'이었다. 10%를 채우지 못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 그리고 헌금을 드렸음에도 여전히 재정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오는 신앙적 회의감. 이 모든 것은 십일조를 '축복 교환권'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발생했던 일이었다.
현재의 나는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 자체를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인정'으로 해석한다. 10%의 액수를 넘어, 내 소득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왔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상징 행위인 것이다. 재정의 많고 적음을 떠나, 나의 중심을 드리는 '두 렙돈 과부'의 정신을 따르려 노력한다.
- 실천의 변화: 나는 이제 헌금을 드린 후 재정 보고서를 챙겨 본다. 내 돈이 쓰이는 곳이 교회의 공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데 합당한지 확인한다. 만약 교회의 복지 지출이 미흡하다고 느껴진다면, 나의 자발적인 헌금(혹은 십일조의 일부)을 따로 떼어 지역 사회 봉사 단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사역에 직접 후원한다. 이는 8장에서 제안했던 개인의 '셋째 십일조' 정신 회복의 실천이다.
2. 창고의 재정의: 나를 넘어 이웃으로
십일조의 목적이 '교회의 창고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은 나의 재정 사용에 명확한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나의 지갑은 더 이상 나의 만족만을 위한 사적인 창고가 아니다.
십일조를 비롯한 나의 모든 재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 신뢰할 수 있는가? (교회가 투명하게 운영되는가?)
- 공의로운가? (헌금이 목회자나 건물 유지에 치우치지 않고 약자에게 흘러가는가?)
- 사랑인가? (의무감이 아닌 기쁨과 자발성으로 드리는가?)
이 질문들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진정한 신앙적 의미를 부여한 재정 사용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불편함은 사라지고, 나의 헌금은 이 땅의 작은 창고에서 하나님의 큰 나라로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3. 나의 작은 영향력
이 글의 여정 내내 독자 페르소나였던 김 집사님과 나(작가)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율법의 무게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무게를 내려놓고, 재정적 청지기(Steward)로서 주체성을 회복했다.
나는 이제 재직자 회의에서 복지 지출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한 사랑의 참여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작은 에세이가 당신의 지갑과 신앙 사이에 놓인 불편함을 해소하고, 기계적인 의무 대신 기쁨의 헌신을 선택하는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십일조 논쟁의 종착점은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까'이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지갑과 신의 나라는 비로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최종 결론: 지갑, 십일조, 그리고 하나님 나라
결국 십일조는 액수도, 의무도 아닌 '방향'의 문제였다. 우리의 헌금이 나를 위한 축복의 통로가 아니라, 교회의 공공성과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는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경적 헌금의 본질이다.
지금도 수많은 김 집사님과 나 같은 보통의 성도들은 율법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러나 이젠 그 고민을 멈추고, 우리 안에 심겨진 '공의'와 '사랑'의 양심에 따라 기꺼이 베풀고 나누는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서야 할 때이다.

'지식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e-Book/2부 교회로 돌아가다.교회의 본질/4장 교회의 시작점 (0) | 2025.11.02 |
|---|---|
| 무료 e-Book/우리는 정말 교회를 '교회'라 부르는가?(1부) (0) | 2025.11.02 |
| 설교 잘하는 목사가 성공한다? 그러다면 설교를 잘한다는 의미는? 서론 (0) | 2025.09.25 |
| 목사의 설교가 교회의 갈등의 원인이 되는가? (0) | 2025.09.22 |
| 예배는 기획 되어야 하는가? (2) | 202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