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의 신학을 파기하다: 맘몬의 성전이 된 현대 교회 분석
서문
과거 1980년대에 건물들마다 붉은 십자가 네온사인이 도시를 비롯하여 시골변방에 이르기까지 빛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 십자가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중대형교회가 아니면 그 십자가 불빛을 보기 힘들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중대형교회들은 교회 후임을 정하는 과정에서 대형교회는 세습을 중형교회는 전별금으로 인하여 충돌과 분열에 이르러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서중심의 설교가로 존경받던 목사가 아들과 함께 분립개척을 하겠다는 이유로 많은 돈을 교회에 요구했다는 것으로 가십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각자의 관점에서 비판과 판단을 하고 있지만 그 배경이 되었던 가치관이나 신앙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짚어 봐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관점에서 현재의 현상들을 분별하고 있느냐는 자가 진단이 필요합니다.
1장.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성경적 가치
주일 아침, 교회로 향하는 길목에서 문득 멈춰 섰습니다. 거대한 성채처럼 솟아오른 예배당 입구에는 매끄러운 광택을 내뿜는 고급 승용차들이 줄을 잇고,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이들이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 풍경은 참으로 평화롭고 안온합니다. 하지만 그 평화로움 뒤에서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짜면 나의 과민한 반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어느덧 '축복'이라는 단어를 '취득'과 혼동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그 현실을 보는 비통함의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의 기도의 제목들은 시장 바구니에 담을 목록처럼 구체적인 욕망들로 채워지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지친 자아를 달래는 심리학적 위로이거나 성공 가도를 달리기 위한 자기계발서의 변주곡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표현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제 교회의 개혁의 시급함을 말해야 할 만큼 만연해 있다는 것이 소름돋게 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비즈니스를 번창케 하고,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며, 노후의 안락함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영적 보험'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제 목사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과연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우리의 현재의 가치관이나 신앙관을 내려 놓고 성경을 펼쳐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외면해온 낯선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를 외치던 세례 요한의 갈라진 목소리, 머리 둘 곳조차 없다며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셨던 예수의 먼지 묻은 발등. 그들은 결코 '주류'의 삶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기득권의 견고한 성벽을 허무는 위험하고도 전복적인 기록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셨을 때, 그분이 분노하신 이유는 단순히 장사꾼들의 소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성전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가난한 자들의 고혈을 짜내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과연 그 채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장을 '부흥'이라 불렀고, 대형화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칭송했습니다. 숫자가 늘어날수록 성경의 가치는 얇아졌고, 건물이 높아질수록 이웃과의 담장은 견고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누군가는 묻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교회가 가난해야만 한다는 건가요?"
질문의 방향이 틀렸습니다.
문제는 '가난하냐 부유하냐'가 아니라, 누구의 논리로 세상을 보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무한 경쟁의 승리 지상주의를 성경적 가치로 둔갑시키는 순간,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세련된 '맘몬의 영업소'일 뿐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윤리적 청렴함이 아닙니다. 거룩한 불편함을 견뎌내는 힘,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정의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외'입니다.
이제 그 화려한 조명을 끄고, 어두운 광야의 정적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파기는 시작됩니다.

2장. 시장경제의 논리가 어떻게 신앙을 잠식했는가?
어느 경제학자는 현대 사회를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은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랑, 우정, 시간, 심지어는 인간의 존엄성까지도 자본의 논리 안에서 환산되고 거래된다는 뜻이지요. 비극적인 사실은, 이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이 성소(聖所)의 문턱을 넘어 예배당 깊숙한 곳까지 뻗어 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신앙생활을 하나님과의 '거래'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하나님은 이만큼 응답하셔야 한다"는 논리.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영적인 투자(Investment)에 가깝습니다.
시장의 논리가 신앙을 잠식하는 첫 번째 징후는 모든 가치를 '수량화'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 헌금의 액수, 전도한 인원수 등 질적인 깊이가 담보되어야 할 영적 여정이 데이터와 통계로 치환됩니다. 교회 성장은 곧 '매출 증대'와 같은 의미가 되었고, 목회자의 역량은 'KPI(핵심성과지표)'처럼 숫자로 증명됩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숫자가 줄어드는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까? 혹시 숫자가 작아지면 하나님도 작아진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시장은 효율성을 최고의 선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희생은 지독히도 '비효율적'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떠나는 목자의 행위는 시장경제의 관점에서는 명백한 손실이자 어리석은 투자입니다.
그럼에도 현대 교회는 점점 더 효율적인 구조를 갈망합니다.
예배는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규격화되고, 공동체 내의 갈등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봉합됩니다. 상처 입은 영혼을 기다려주는 인내보다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해주는 프로그램이 선호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틈조차 주지 않는 치밀하게 짜인 시스템. 그 안에서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상품이 됩니다.
잠깐,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대 그리스도인은 종종 종교적 '소비자'의 태도를 보입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골라 듣고, 자신에게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를 쇼핑하듯 찾아다닙니다. 교회는 이 소비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화려한 조명과 더 감동적인 음악, 그리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메시지를 생산해냅니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공급자'로 전락합니다. 공급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시장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장경제는 '결핍'을 먹고 자랍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더 많은 소비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많은 강단이 이 공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당신은 아직 복을 덜 받았다"
"당신은 더 열심을 내야 한다“
며 영적인 갈증과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종교적 행위라는 상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결코 결핍의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은혜에 대한 감격이었고, 세상이 채울 수 없는 근원적인 풍요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신앙 안에서 가난한 자는 '축복받지 못한 낙오자'가 됩니다. 성공한 자는 자신의 부를 신앙의 증거로 삼아 기득권의 자리에 앉습니다. 이것이 바로 맘몬이 교회를 점령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익숙한 잠식으로부터 깨어나야 합니다. 가격표를 떼어내고, 효율성의 우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앙은 거래가 아니라 관계이며, 하나님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다시금 '광야의 가난'을 선택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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