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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임한 십자가, 그 소외된 자들의 구원론

노아김 2025. 12. 28. 16:51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강단 위로 세련된 찬양이 흐른다.

 수천 명의 회중이 일제히 두 손을 들고 간절히 '축복'을 구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우리는 그곳을 '성전'이라 부르고, 그 열기를 '뜨거운 신앙'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문득, 이 거대한 환희의 소음 너머로 준엄한 질문 하나가 가슴을 파고든다.

 

 "우리는 지금, 진정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빌딩 숲의 가장 높은 층에서 승전보를 울려주는 제국의 수호신인가, 아니면 먼지 날리는 광야 끝자락에서 이름 없는 자들의 신음과 함께하는 '히브리'의 하나님인가.

 

슬프게도 현대 기독교의 복음은 어느덧 '번영'이라는 화려한 옷을 입었다.

 

 고난은 실패의 증거가 되었고,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하는 유일한 영수증으로 둔갑했다.

 

 높은 곳을 향한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 신앙의 경주가 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십자가조차 금빛으로 도금하여 승리의 트로피처럼 목에 걸고 다닌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십자가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 가장 소외된 자, 가장 수치스러운 자들이 머물던 형장의 이슬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곳은 로마의 궁전이 아니라 마구간의 구유였고, 그분의 마지막 숨결이 닿은 곳은 기득권의 성소가 아니라 성문 밖 저주받은 언덕이었다. 그분은 스스로 소외된 자, 즉 '하비루(Habiru)'가 되심으로써 세상이 외면한 이들을 구원하셨다.

 

 오랜 고민 끝에 필자는 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젖어 들었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히브리 정신'을 다시 불러내고 싶었다.

 

 민족적 혈통을 자랑하는 선민의 역사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에서 밀려난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일구어낸 저항과 연대의 역사를 말이다.

 

 이 글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는 큰 불편함을 줄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쌓아 올린 견고한 종교적 기득권과 안락한 신앙의 울타리를 스스로 허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너진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 무너지는 성벽의 틈새로 비로소 낮은 곳으로 흐르는 진정한 은혜의 물길이 보일 것이다.

 

 지금 당신의 기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당신의 하나님은 승리자들의 박수 소리 속에 있는가, 아니면 패배자들의 눈물 젖은 골목에 있는가?

 이제 그 화려한 성전의 문을 열고 광야로 나아가려 한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진짜 하나님, 낮은 곳으로 임한 십자가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1장: 하비루(Habiru): 민족이 아닌 상태로서의 이름

 

 우리는 흔히 '히브리'라는 단어를 들을 때 특정 혈통과 유전적 형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민족'을 떠올린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견고한 혈연의 사슬, 그것이 우리가 배운 히브리의 정의였다.

 하지만 성서 고고학의 먼지를 털어내고 고대 근동의 쐐기문자 판들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던 히브리의 얼굴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기원전 2천 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기록에는 '하비루(Habiru)' 혹은 '아피루(Apiru)'라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결코 공통된 조상을 가진 종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바루는 혈통의 이름이 아니라 '상태'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도시 국가의 세금과 강제 노역을 견디다 못해 체제 밖으로 탈출한 도망자들이었으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도는 부랑자였고, 때로는 생계를 위해 칼을 잡는 용병들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당대 제국이 구축한 안정적인 질서와 법의 테두리에서 철저히 '배제된 자들'이었다.

 

 성경은 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찬란한 왕조의 후예가 아닌, 이 보잘것없는 '하비루'라는 단어 속에 뿌리박게 했는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히브리 사람'이라 불렸을 때, 그것은 고귀한 귀족의 칭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정착된 가나안의 질서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장막을 치고 살아가는 '낯선 타자'임을 폭로하는 명칭이었다.

 하나님은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이집트의 파라오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거대한 문명의 톱니바퀴 아래서 신음하며 튕겨져 나간 하비루들,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없는 그 소외된 자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하고도 혁명적인 선언이다. 신앙의 출발점이 기득권의 수호가 아니라 기득권으로부터의 탈출에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을 마치 선택받은 우월한 계급장처럼 여기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성벽을 높이 쌓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불러야 할 하나님은 그 성벽 밖, 오늘날의 하비루들이 울고 있는 그 거친 길 위를 걷고 계신다.

 

 학자 노먼 고트왈드는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초기 공동체는 혈통적 결합이 아니라, 억압적인 가나안 왕정 체제에 저항하여 일어난 '사회적 해방 세력'의 결합이었다고.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안주'가 아니라 끊임없는 '이탈'이어야 한다.

 

 강자의 논리에서 이탈하고, 자본의 질서에서 이탈하며, 소외된 자들의 곁으로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하비루의 정신으로 말이다.

 

 히브리라는 이름 속에 담긴 그 처절한 고립과 저항의 흔적을 회복하지 않는 한, 우리의 신앙은 박제된 종교 놀이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떠돌이가 되어야 한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득권이라는 이름의 정착지를 떠나 불확실한 광야의 길을 걷는 진짜 '하비루'가 되어야 한다.

 

2장. 광야의 계보: 아브라함과 언약의 진정한 의미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흔히 대단한 복의 통로가 되는 성공 신화의 서막으로 읽히곤 한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는 그 달콤한 약속에 매몰되어, 우리는 그 약속이 선포된 장소와 그가 떠나온 자리를 쉽게 망각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기득권의 확장인가, 아니면 기득권의 포기인가?

 

 그가 떠나온 갈대아 우르는 당대 가장 풍요로운 문명의 중심지였다. 질서와 안락, 그리고 예측 가능한 미래가 보장된 제국의 품을 떠나 그가 도달한 곳은 다름 아닌 '광야'였다. 광야는 지도에 선이 없는 곳이며, 어제의 안위가 오늘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 철저한 '비결정의 공간'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성벽 안의 계약이 아니라 광야 길 위에서의 약속이었다.

 

 우리는 이제 '언약'의 히브리어인 '베리트(Berit)'에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는 '쪼개다'라는 뜻의 어원에서 왔다.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은, 약속을 어길 시 이 짐승처럼 쪼개지겠다는 목숨을 건 결단을 의미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새를 쪼개고 그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게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쪼개진 짐승(새) 사이를 누가 지나갔느냐 하는 점이다. 성경은 홀로 타오르는 횃불이 되어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이것은 주권자가 스스로를 쪼개어 비천한 떠돌이(하비루)인 아브라함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 일방적 헌신: 보통은 계약의 두 당사자가 함께 지나가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시고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다.
  • 책임의 전가: 이는 인간이 연약하여 언약을 어길지라도, 그 어긴 대가(죽음)를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지시겠다는 선언이다. 즉, "네가 약속을 어겨도 내가 대신 죽겠다"는 신적 사랑의 선언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는 십자가'의 원형적인 그림자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쪼개어 광야의 먼지 속에 섞이셨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핵심은 그가 부자가 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그네일 때 창조주가 그의 '길동무'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에 히브리의 계보는 혈통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족보가 아니라, 광야라는 결핍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걸했던 '결핍의 역사'여야 한다.

 

새를 쪼개어 언약식을 하신 것은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스스로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처절한 연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소외된 인간의 운명 속으로 뛰어드신 하나님의 '히브리적 성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아브라함의 복을 빌딩을 사고 사업이 번창하는 것과 연결한다. 그러나 광야 없는 아브라함은 그저 탐욕스러운 제국의 시민일 뿐이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은 신앙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바벨탑을 쌓는 데 급급하다.

 

 솔직히 말해 보자.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처럼 익숙한 갈대아 우르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교회라는 이름을 빌려 또 다른 우르를 건설하고 있지는 않은가?

 

 언약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다.

 

 광야의 계보는 바로 그 '비움'과 '떠남'의 발자국들이 모여 만들어진 길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그가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를 통해 제국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불확실한 광야로 한 걸음을 내디딘 그 '히브리적 용기'의 표본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 때문이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원형은 안락한 성소에서의 예배가 아니라, 내 삶의 가장 취약한 광야에서 나를 대신해 쪼개지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그 처절한 언약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넘어 진정한 광야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3장. 혈통의 성벽을 넘어: 유대주의적 가치관의 한계

 

 광야의 먼지 속에서 피어난 '하비루'의 역동적인 생명력은, 시간이 흐르며 차갑고 견고한 '성벽' 안으로 유폐되기 시작했다.

 

 나그네의 하나님은 어느덧 거대한 성전의 주인이 되었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던 광야의 길은 특정 혈통만이 통과할 수 있는 좁고 배타적인 문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종교가 되고, 복음이 기득권이 되는 타락의 서막, 즉 '유대주의적 가치관'의 탄생이다.

 

 유대주의의 핵심은 '구별'에 있다. 누가 할례를 받았는가, 누가 율법의 세밀한 조항을 지키는가, 누가 아브라함의 순수한 피를 이어받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한때 정체성을 지키는 방패였으나, 어느 순간 타자를 밀어내고 차별하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세상과 분리된 '특수 계급'을 만들기 위함이었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의 언약은 언제나 '너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으리라'는 보편적 확장을 지향한다. 그러나 유대주의는 이 보편성을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에 가두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자격으로 오해했고, 자신들이 맡은 사명을 권력으로 착각했다.

 이러한 혈통의 성벽은 단순히 고대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예수'라는 이름을 앞세워 또 다른 유대주의의 성벽을 쌓고 있다.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면 안 된다"

 "교리에 동의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성공하지 못한 자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 언어들은 고대의 할례나 정결 예식만큼이나 강고한 장벽이 되어 오늘날의 하비루들을 밀어낸다.

 

 성경 속 예수는 바로 이 성벽을 허물기 위해 오신 가장 급진적인 히브리인이었다.

 

 그분은 유대주의가 '부정한 자'라 낙인찍은 나병 환자, 창녀, 세리, 사마리아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한복판으로 초대하셨다. 혈통의 순수함보다 고통받는 자와의 연대를 우선하셨던 예수의 행보는, 당대 종교 기득권자들에게는 신성모독이자 체제 전복적 위협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예수의 길을 따르기보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리새인들의 논리에 더 익숙하다. 누가 우리 공동체의 수준에 맞는 사람인지, 누가 우리 성전에 들어오기에 '정결한지'를 따지는 눈빛 속에 이미 히브리 정신은 소멸해버렸다.

 혈통과 교리의 성벽을 넘지 못하는 신앙은 결국 고여서 썩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성벽 안의 고요함보다 성벽 밖의 아우성을 더 사랑하신다. 우리가 쌓아 올린 유대주의적 가치관, 그 편협한 우월주의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소외된 자들의 하나님'을 온전하게 마주할 수 있다.

 

 4장. 기득권의 성소: 현대 교회가 놓친 낮은 곳의 음성

 

 성소(Sanctuary)의 본래적 의미는 화려한 금빛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광야를 떠도는 이들의 신음이 멈추고, 신의 자비가 인간의 결핍과 만나는 '사건의 장소'였다. 하지만 현대의 성소는 어느덧 번영과 안락함을 정당화하는 독배가 되어버렸다. 성공을 복음으로 착각하고, 풍요를 은혜의 척도로 삼는 동안 우리의 신앙은 야성을 잃었고, 우리의 십자가는 박제되었다. 우리가 부르짖던 하나님은 어느새 우리의 욕망을 투영한 길들여진 신으로 전락했다.

 

 현대 교회의 강단은 높고 견고하며 눈부시게 화려하다. 그 화려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변명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그것이 세상의 낮은 음성들이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종교적 기득권의 절벽처럼 보인다.

우리는 지금 '성공한 자들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의 문턱은 낮아졌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문을 열고 들어와 가장 앞자리에 앉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회적 지위가 견고하고, 헌금의 액수가 당당하며, 번듯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이 성소의 주인이 된 시대다. 그들만의 세련된 언어와 매너가 성소의 공기를 지배하는 동안, 투박한 손마디를 가진 노동자의 탄식과 삶의 무게에 짓눌린 소외된 자들의 흐느낌은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묻혀버린다.

 이것은 명백한 '성소의 사유화'다.

 성경 속 예언자들은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성전을 기득권의 요새로 삼을 때마다 목숨을 걸고 사자처럼 포효했다. 그들은 번제물의 향기보다 억눌린 자의 공의를 먼저 찾으라고 외쳤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금으로 치장된 지성소가 아니라, 짓밟힌 자의 상한 심령 속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높은 곳으로 향하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골몰한다. 대형화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기득권의 논리를 복음으로 포장하고, 사회의 부조리에는 눈을 감은 채 개인의 안녕과 평안만을 빌어주는 '종교 서비스'를 생산해낸다.

 우리가 느끼는 지금의 교회는 하비루(Habiru)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하비루들을 양산하는 제국적 시스템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어버린 모습을 부정하기 어렵다. 낮은 곳의 음성은 불편하고, 소외된 자의 존재는 세련된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성소의 외곽으로, 끝내 교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기득권의 성소를 허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성막(Tabernacle)을 텐트 형태로 만드셨던 이유는 당신이 고정된 권력이 아니라 고통받는 백성과 함께 이동하는 '나그네의 신'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본래의 성소는 성벽 안에 갇힌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이동하는 '움직이는 텐트'였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기득권이라는 안식처를 떠나 다시 '하비루(Habiru)'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소는 화려한 대리석 건물이 아니라, 세상의 거친 비바람을 맞으며 소외된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 '광야의 텐트'여야 한다. 가장 낮은 곳의 음성이 가장 크게 들리는 곳, 그곳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높은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권력의 확신인가, 아니면 성전 문밖에서 떨고 있는 작은 자들의 가녀린 숨소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 신앙의 생사를 결정할 것이다.

 

5장. 번영신학이라는 우상: 부와 성공이 복음이 된 시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현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림하고 있는 신은 누구인가. 슬프게도 그는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라, '번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현대판 바알이다.

 

 번영신학은 매혹적이다.

 

 "믿으면 복을 받고, 복은 곧 물질적 풍요와 성공으로 나타난다"

 

는 이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욕망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신앙은 어느덧 하늘의 보화를 구하는 통로가 아니라, 이 땅의 자본을 끌어오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필자는 단언한다. 부와 성공이 복음의 증거가 된 시대는 가장 참담한 영적 파산의 시대다.

 

 번영신학의 가장 큰 해악은 가난과 고난을 '죄' 혹은 '믿음의 부족'으로 낙인찍는다는 데 있다.

 

 성공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되고, 실패한 자는 하나님의 외면을 받은 자로 전락한다. 이 논리 구조 속에서 '하비루(Habiru)'들, 즉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는다. 그들의 가난은 극복해야 할 저주일 뿐, 함께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무게가 되지 못한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교묘하게 위장된 '성공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성경 속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부자가 되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적으로 설정한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경고하셨으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것은 가난 자체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것 없는 자만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히브리적 단독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이 역설적인 복음의 진리를 외면한 채, 신자들에게 '긍정의 힘'과 '축복의 비결'을 판다. 기도는 자판기처럼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행위가 되었고, 예배는 성공을 향한 결의를 다지는 의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자기 부인은 불편한 유물이 되어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강조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제국의 안정을 꾀하는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들의 신음 속에 개입하여 기득권의 질서를 흔드는 분이라고.

 번영신학은 바로 이 '흔드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안락을 위해 '길들여진 하나님'으로 바꾸어버린 우상숭배와 다를바 없다.

 

 우리는 이제 이 화려한 우상의 제단을 우리 스스로 허물어야 한다.

 

 신앙의 진정성은 내 지갑의 두께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열정보다, 사다리 아래서 신음하는 이들과 함께 머무는 인내가 진정한 복음의 능력임을 기억해야 한다.

 번영의 환상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낮은 곳에 임하신 진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그분은 부유한 자들의 박수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조용한 기적 속에 계신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가. 내 욕망이 투영된 황금 송아지인가, 아니면 소외된 자들과 함께 걷는 고난의 주님인가?

 

6장: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본연의 얼굴

 

 우리가 성경의 책장을 넘길 때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가장 집요하게 마주하는 하나님의 자기소개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지의 창조주'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지극히 낮고 구체적인 고백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는 사회적 보호망에서 완전히 탈락한 가장 취약한 '하비루(Habiru)'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땅도, 남편도, 부모도 없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증명해 줄 세상적인 근거가 전무한 존재들이었다.

 하나님은 왜 굳이 이들의 이름을 당신의 명예와 결부시키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Justice)가 단순히 기계적인 공정함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 즉 '미슈파트(Mishpat)'는 기득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 아니라, 그 질서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편드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중립을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고통의 무게가 더 무거운 쪽으로 당신의 몸을 기울이시는 분이다.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거룩'하시다면, 그 거룩함은 화려한 성전의 향연이 아니라 소외된 자를 향한 '불타는 긍휼' 속에서 증명되어야 한다고.

 성경의 율법 곳곳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서려 있다. 추수할 때 밭모퉁이를 남겨두라는 명령,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는 배려,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잔치로 쓰라는 규정들. 이것은 단순한 구제 사업이 아니다. 풍요를 독점하려는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고,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아바루'로 남지 않게 하려는 강렬한 신적 의지의 표현이다.

 현대 교회는 이 하나님의 얼굴을 지나치게 추상화하거나 박제해버렸다. 하나님을 '영적인 위로자'로만 제한하면서, 그분이 현실 사회의 불의와 결핍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계시는지는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도움의 대상'으로는 보지만, 그들이 곧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는 '살아있는 성소'라는 사실은 잊고 산다.

 

 예수는 바로 이 하나님의 얼굴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의 공생애는 기득권의 식탁에서 쫓겨난 이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일로 가득했다. 종교 권력자들이 '죄인'이라 부르며 금을 그을 때, 예수는 그 선을 넘어 그들의 깨진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셨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 성공의 빛에 가려진 번쩍이는 우상의 얼굴인가, 아니면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인가.

 신앙의 본질은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 도달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그 '낮은 곳'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그분과 함께 울고 있는가에 있다.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관념의 늪을 벗어나 생생한 삶의 현장이 될 것이다.

 

7장. 십자가의 역설: 소외된 자들을 향한 구원의 완성

 

 기독교 구원론의 정점인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한 '역설'의 현장이다.
 그것은 승리의 깃발이 아니라 패배자의 형틀이었으며, 영광의 왕관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의 가시관이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너무나 쉽고 화려하게 장식한다. 교회 꼭대기의 네온사인으로, 목에 거는 세련된 장신구로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본질은 그 어떤 장식으로도 가려질 수 없는 철저한 '소외'와 '버려짐'에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친히 '하비루(Habiru)'가 되셨음을 의미한다.

 

 당시 로마의 법전에서 십자가형은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반역자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노예들에게만 집행되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 방식이었다(자세한 내용을 알려면 클릭).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방법은 하늘의 권능으로 불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죽어가는 것이었다.

 

 필자는 묻고 싶다. 우리가 믿는 구원이 정말 이 십자가의 비천함을 통과한 것인가.

 

 번영신학은 십자가를 성공을 향한 징검다리쯤으로 여긴다. 고난은 잠시일 뿐, 결국에는 찬란한 부활과 승리가 우리의 기득권을 보장해 줄 것이라 가르친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공허한 승리주의일 뿐이며, 낮은 곳을 거치지 않은 구원은 약자들을 위협하는 또 다른 권력이 될 뿐이다.

 

 십자가의 구원은 '편드는 사랑'의 극치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이 '부정한 자', '실패한 자', '버려진 자'라 낙인찍은 모든 소외된 이들과 당신의 운명을 하나로 묶으셨다. 그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셨을 때, 그 비명은 역사 속에서 버림받은 모든 이들의 신음과 공명했다.

 

 구원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시혜를 베푸는 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하비루'가 되어주시는 처절한 연대다. 소외된 자들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가 아니라 신이 내 곁에 계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미안하지만(?) 기득권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이 십자가는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자신들의 힘과 자원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죽음은 결코 복음이 될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한 자들,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만이 이 역설적인 사랑의 깊이를 알아본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우리의 기득권을 정직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쌓아 올린 성공의 신화, 타인을 배제하며 얻은 안락함은 십자가의 붉은 보혈 앞에서 그 추악한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십자가는 구원의 완성이자 기득권을 향한 최종적인 심판이다.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십자가 아래서 누구와 함께 울고 있는가?"

 

 이 질문에 응답하는 자만이 이름뿐인 종교의 성벽을 넘어 진정한 히브리의 정신으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8장. 회복의 공동체: 예수와 사도들이 꿈꿨던 연대

 

 기득권의 성벽을 허물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십자가의 구원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제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곧바로 세상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형태의 '연대'로 이어졌다.

 

 필자는 묻고 싶다.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성공한 이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는 클럽인가, 아니면 깨진 삶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회복의 거처'인가.

 

 예수와 사도들이 꿈꿨던 공동체는 철저하게 '히브리적 연대'였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전복적인 가치를 심어주셨다. 그것은 서열과 위계로 유지되는 제국의 질서를 뿌리째 흔드는 행위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풍경을 묘사한 사도행전의 기록은 가히 충격적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것은 단순한 공산주의적 실험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하비루(Habiru)'가 되어준 것이다.

 

 자신의 소유가 곧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 서로의 결핍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그곳에는 더 이상 부유한 자의 거드름도, 가난한 자의 비굴함도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낮은 십자가 아래서 평등하게 연결된 형제와 자매만이 존재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는 이 역동적인 연대를 '관리'와 '조직'으로 대체해버렸다. 우리는 서로의 필요를 깊이 알기보다 서로의 명함을 먼저 확인하며, 상처를 드러내기보다 잘 정돈된 일상의 가면을 쓰는 데 더 익숙하다. 소외된 자들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도 그들은 여전히 소외감을 느낀다. 우리의 연대가 그들의 결핍을 껴안을 만큼 충분히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를 '몸'에 비유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프면 온 몸이 함께 고통을 느낀다. 이것이 연대의 본질이다. 누군가의 가난이 나의 부끄러움이 되고, 누군가의 외로움이 나의 소명이 되는 것. 그리하여 공동체 자체가 세상의 거친 비바람을 막아주는 거대한 '광야의 텐트'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이 꿈꿨던 연대는 끼리끼리의 뭉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 밖의 아바루들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개방적 연대'였다. 기득권의 성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성벽을 허물어 길을 내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회복의 공동체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 공동체 안에 가장 낮은 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소외된 자들의 신음 소리까지 찬양으로 승화시킬 만큼 깊은가.

 진정한 회복은 프로그램이나 건물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서로의 발을 씻겨주던 낮은 자리로 돌아갈 때, 기득권을 내려놓고 연약함으로 연대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가 임하는 곳이며, 히브리 정신이 살아 숨 쉬는 하늘 나라의 전초기지이기 때문이다.

 

9장. 내 이웃은 누구인가: 연약한 자와 더불어 사는 삶

 

 우리는 흔히 '이웃'이라는 단어를 내가 선택하고, 나를 반겨주며,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삶을 영위하는 안전한 관계의 울타리로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웃의 정의는 우리의 이 안락한 정의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며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 속에는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의 한계를 어디까지로 정해야 합니까'라는 기득권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에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그 질문의 방향 자체를 뒤집어버리신다.

 이웃은 내가 규정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되어주어야 할 '사건'이다.

 강도 만난 자가 길 위에 쓰러져 있을 때, 당대 종교의 기득권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부정함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외면했다. 그들에게 그 가련한 자는 자신들의 정결을 위협하는 '방해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유대주의적 성벽 밖에서 '하비루(Habiru)'처럼 취급받던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일정과 자원을 멈추고 그의 깨진 삶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곁의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자본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된 이들, 차별의 언어에 베여 숨죽여 우는 이들, 종교적 성벽 안으로 초대받지 못한 이 시대의 모든 '아바루'들이 바로 우리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얼굴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현대 교회는 사마리아인의 자비보다 제사장의 정결을 더 소중히 여긴다. 소외된 자들과 섞이는 것은 불편하고 위험하며, 때로는 공동체의 '세련된 분위기'를 해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우리 삶의 영역으로 들어와 우리의 안락함을 흔드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시혜'가 아니라 '동행'이다. 위에서 아래로 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길바닥에 함께 앉아 그의 신음 소리를 내 호흡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연약한 자와 더불어 사는 삶은 나의 기득권을 쪼개어 그의 결핍을 메우는 언약적 결단이다.

 

예수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관념적인 사랑의 훈계가 아니라, 기득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외된 자들의 현장으로 뛰어들라는 강력한 실천적 소명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곁에 서 있는가. 박수받는 자들의 화려한 잔치판인가,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는 길 위의 고독한 자리인가.

 내 이웃은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 내 안락함을 위협하는 그 불편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진정한 이웃의 얼굴이다. 연약한 자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낮은 곳으로 임한 십자가'의 살아있는 증인이 될 수 있다.

 

10장.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 기득권을 내려놓는 용기

 

 우리는 지금까지 '히브리'라는 이름의 처절한 기원과 그것이 박제된 종교로 변질되어가는 슬픈 과정을 추적해왔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과제는 관념의 비판을 넘어 실천적 존재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직하게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용기'의 문제로 귀결된다.

 

 필자는 단언한다. 기득권은 신앙의 결실이 아니라, 신앙이 넘어야 할 가장 높은 성벽이다.

 

 우리는 흔히 내가 가진 자원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 부르며 소중히 간직한다. 하지만 그 축복이 나만의 울타리가 되어 낮은 곳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미 축복이 아니라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다. 기득권을 내려놓는 용기란, 나를 보호해주던 그 견고한 감옥의 문을 스스로 열고 광야로 걸어 나가는 결단이다.

 

 하지만 진심, 이 용기는 두렵다. 안정을 포기하고 불확실성을 택하는 일이며, 주류의 질서에서 스스로 '아바루(Habiru)'가 되기로 작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생애가 보여준 패러다임은 명확했다. 그분은 신의 영광이라는 최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인간의 연약함 속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자신을 던지셨다.

 

 새로운 신앙은 '성전 중심'에서 '현장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화려한 예전(Liturgy)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의 삶 자체가 우리의 가장 거룩한 예배지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사교장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며 소외된 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공동체'로 거듭날 때 히브리 정신은 비로소 부활한다.

 또한, 우리는 '성공의 서사'를 버리고 '약함의 서사'를 써 내려가야 한다. 세상은 강함을 자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하는 자들이다. 내가 약해질 때 비로소 내 곁의 약한 자들이 보이고, 그들과 손을 잡을 때 비로소 십자가의 연대가 완성된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지금 당신의 손에 꽉 쥐고 있는 그 '기득권의 조각'은 무엇인가. 사회적 명망인가, 안정적인 자산인가, 아니면 남보다 우월하다는 종교적 자부심인가?

 

 이제 그것을 내려놓을 시간이다. 손을 비울 때만 우리는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하신 그분의 손을 잡을 수 있다. 기득권의 성벽 위에서 내려와 낮은 땅의 흙먼지를 묻히며 걷는 그 걸음이야말로, 우리를 진짜 히브리인으로 만드는 가장 고귀한 순례의 길이다.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다시 안락한 성벽 안으로 숨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성벽 밖,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낮은 곳에서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용기를 내어 그분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한 십자가'의 경이로운 구원을 온몸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

 

결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넘어 진정한 히브리인으로

 

 우리는 긴 여정을 거쳐 다시 '히브리'라는 이름 앞에 섰다. 제국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던 떠돌이와 부랑자들의 이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기에 오직 하나님께만 소속될 수 있었던 그 가난한 이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정직하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완장처럼 차고 기득권의 성벽 위에서 군림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낮은 곳의 이웃과 연대하는 '진정한 히브리인'인가.

현대 교회의 번영과 안락함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독배였는지 모른다. 성공을 복음으로 착각하고, 풍요를 은혜의 척도로 삼는 동안 우리의 신앙은 야성을 잃었고, 우리의 십자가는 박제되었다. 우리가 부르짖던 하나님은 어느새 우리의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길들여진 신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길들여지지 않으신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성전 밖에서,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들과 함께 먼지 날리는 길을 걷고 계신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기득권이라는 안식처를 떠나 다시 '하비루(Habiru)'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히브리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 체계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힘의 논리에서 사랑의 논리로, 독점의 문화에서 나눔의 문화로, 군림의 자리에서 섬김의 자리로 우리의 존재 양식을 송두리째 옮겨 심는 일이다.


 필자는 믿는다. 우리가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우리가 쥐고 있던 권력의 조각들을 가난한 이웃의 손에 쥐여줄 때, 그 비워진 손바닥 위로 진정한 구원의 경이가 깃들 것임을.

이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의 새로운 순례가 시작되기를 소망한다. 이름뿐인 종교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시는 그 '낮은 곳의 하나님'을 향해 용기 있게 걸어 나가라.

비록 그 길이 거칠고 고독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십자가를 지고 앞서가신 최고의 히브리인, 예수가 이미 그 광야의 길 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넘어 진정한 히브리인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가장 찬란한 저항이자, 낮은 곳으로 임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종적인 구원의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