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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해 불확실하던 청년시절 교회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회에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노아김 2025. 1. 21. 06:07

 처음 교회에 가게 된 것은 사소한 연관성 때문이다. 성탄절이면 교회에서 빵을 나눠준다. 그것이 나를 교회에 가게 했다. 가난했던 초등확교 시절,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에 안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미션스쿨을 다니게 되면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학교 예배 그리고 학교에서 요구하는 교회주보를 받기 위하여서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 출석은 나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지는 못했다. 그냥 교회라는 집단에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성년이 되고 난 후, 친구들을 만나서 소식을 물어보면 당시 함께 학생부에 출석했던 친구들 중에 꾸준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내가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착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교회가 율법적인 면도 많았다. 내가 교회에 다니려고 마음 먹었다면 적어도 윤리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의 하나가 술과 담배를 끊는 일이었다. 전도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나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면에서 교인이 된다는 것이 대중적이지는 못했지만, 나름 윤리적인 면에서는 사회의 긍정적인면이 있었다.

 청소년 시기를 지나고 성년이 되는 과정에 나는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가두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학벌이 없이 어떻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국 대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현실에서는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주변의 친구들도 같은 부류였다.

 매일 시내에서 만나 동네를 배회하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즐거웠다. 하지만 그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는 답답했다. 내가 가져왔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고행을 떠나 아는 사람이 없는 타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는 내가 자란 곳이 부산이지만, 실제로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다. 하지만 서울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나의 미래를 위해서는 날마다 친구들이 나를 반기는 고향을 떠나야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는 것을 좋아했고, 글을 쓰면 칭찬도 많이 받았다. 내가 인정 받았던 순간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되는 과정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여튼 당시의 생활에서는 그런 꿈을 이루기에는 현실과 괴리가 너무 심했다. 그래서 서울로 상경 하였다.

서울에는 친구의 자취방이 있었다. 그 유명한 은마아파트였다. 그리고 어릴 적 헤어졌던 나의 아버지가 사는 곳이 서울이었다. 친구와 잠시 지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나, 타향과 같은 서울에서 며칠을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지루한 일이었다. 그것도 가진 돈이 없이 없었으니 더욱 즐거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리라고 마음먹었다. 교회라는 곳은 낯선 사람도 반갑게 맞이해 주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래의 사람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고, 윤리적으로 깨끗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다는 주일에 교회에 출석을 했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목사가 출입구에서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나와 마주치자. 이렇게 말을 한다.

형제님, 요즘 잘 안보이시는 것 같은데, 봉사하러 자주 나오세요.”

라고 한다.

목사라고 전교인의 얼굴을 다 알겠냐마는 대형교회도 아니었는데, 내가 초신자인지 기존 신자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교회에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만약 그날 누군가 나와서 교회를 안내해 주고, 신앙생활에 대한 길라잡이를 해 주었다면 한 번의 방문이 아니라 그 교회와 인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갓 20살이었던 청년으로서의 나는, 삶의 전환점으로 택한 곳이 교회였다.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밝은 미래의 비전을 함께 나누며 나의 소망을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첫 시작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신앙이 없었던 청년이 교회를 찾은 이유는 단순하게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었고, 크게는 세상을 사는 의미와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곳은 과연 이처럼 청년의 외로움과 이상을 채울 수 있는 그런 곳인가? 넓은 의미로 봤을 때는 코이노니아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의미와 역할에서 기본적인 것이다. 나의 청년시절은 진리를 찾아 헤매이는 구도자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막다른 어둠의 길에서 참빛을 찾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가 참빛의 코이노니아를 잃어버렸다.

그 이유는 복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의 코이노이와 비전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귐과 사회적인 이윤만 추구하다보니, 이를 채울 수 있는 대형교회만 겨우 살아남을 뿐. 일반적인 교회는 웬만한 자본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는 현대적인 욕구를 채울 수가 없어 쇠퇴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수많은 구도자의 예를 볼 수 있다. 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면 오늘 우리 교회의 나갈 바를 알 수 있다. 병든 자에게는 치료를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그리고 죄 지은 자에게는 용서를 베푸셨다. 하지만 이것은 현상에 불과할 뿐 가장 핵심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자 구도자들이 진리를 만나야 할 핵심이다.

예수님의 속죄의 복음을 듣어서 믿기 전에는 말그대로 구도자로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그들은 참된 성도가 된다. 성도가 되어야 코이노니아와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비전을 가지게 된다.

교회의 정의에 대해 벨기에 신앙고백은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그의 피로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은 참된 신자들의 회중인 한 보편교회 혹은 우주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고 되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입은 택한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보편교회의 정의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일원으로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받아들여 성도가 되었다는 외형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유형교회에서는 세례이다. 그렇다면 내가 구도자로서 진리를 찾기 위해 교회를 찾았던 청년시기에 제일 시급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그 복음을 들을 수가 없었다. 보편적인 윤리나 교회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다가 직접 이 복음을 접하였다. 오랜시간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에서 이 복음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늘 아쉽게 가슴에 남아있다. 그 이후 난 누구를 만나든지 이 복음을 항상 먼저 증거하였다.

십분 양보하여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예배에 참여하기 때문에 복음의 핵심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면, 적어도 구도자를 위한 복음증거 기회는 교회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필요이유이기 때문이다.